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동서 분할과 내부 쇄신 == [include(틀:로마 제국의 전제정)] [[파일:033d133533455f127320d197feb25028.jpg]] 서기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이론적 개념으로 복수의 황제가 분할 통치하는 개념이 가능해졌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로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와 같이 복수의 황제가 당연하게 각자의 통치권역을 장악하는 방식을 일반화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황제들 역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방법을 일반화하여 복수의 후계자에게 완전히 계승케 하진 않거나 하더라도 그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게획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기 전까지의 58년 동안, 제국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분담 통치 내지 복수 정부의 관할 담당이 영구 분할로 향할 것을 예측케 했다. 이는 두 수도가 정식으로 수립되고, 두 원로원이 존속하게 된 상황에서 제국의 면적이 방대하고 국내외 문제들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발렌티니아누스 생전 군장교들과 로마 엘리트들이 공동 황제 임명을 요구하는 등 복잡한 사정이 맞물리면서 시간 문제로 비춰졌다. 특히, 동서로마 간 상황 차이가 여전했다. 여기에 더해 3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통일 후 복수의 아우구스투스를 내세우기보다 제국의 복잡한 사정을 고치고 다른 부분에서 주안점을 뒀다는 점은 자칫 분할 통치가 영구 분할로 인식될 것으로 예상케 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생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공교롭게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은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처럼 다시 동·서가 합쳐지지 못하였다. 동방과 서방을 관할하게 될 아우구스투스들이 별개의 정치세력에게 따로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대제의 두 아들은 어렸고 그들의 능력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무능했다. 설상가상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처럼 온전히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사망한데다, 아직 서로마 일대 정세는 동로마와 달리 불안요소가 많았다. 이 결과,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어린 황제들과 그 후계자들 아래에서 제국은 로마와 노바 로마에서 각각 임명된 1년 임기 집정관 혹은 섭정으로 불리는 이들이 어린 황제를 보필하면서 명목상 통일을 유지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제국을 방어하고 통치했다. 따라서 황제의 조각상과 프로파간다 정책들은 나란히 전시되고 추진되었고, 제국의 법률들은 공동 명의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한 정부가 공포한 법률은 다른 정부가 복잡한 사정으로 호혜 원칙 하에 공포하지 않거나 온전히 집행되지 않는 일이 빈번해, 종국적으로 제국의 동방과 서방 행정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따로 국밥처럼 운영되게 됐다. [[아르카디우스]] 시절에는 [[서고트 왕국|서고트족]]의 침공을 받아 서로마의 [[스틸리코]]의 도움을 받는 등 오히려 서쪽에 비해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기나긴 통치를 거치며 --[[훈족]]과 [[사산 제국]]에게 금을 바치고-- 제국은 안정을 찾았다. 여담으로 그의 치세에 그 유명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이 지어졌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이후 [[마르키아누스]]는 국방을 강화하였고, 비록 [[레오 왕조]]의 [[제노]] 대에 혼란을 겪었지만[* 그리고 그의 두번째 치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476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동로마판 대동법을 실시하며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 국고에 3년치 예산을 채워 놓은 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에게 바톤을 넘겨주었다. 이는 6세기 중반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재정복의 기반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